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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탄사지,헌강왕릉,정강왕릉,천관사지~2023년 12월 5일

龍宮 2023. 12. 5. 21:33

미탄사지삼층석탑

1. 어       디 : 미탄사지,헌강왕릉,정강왕릉,천관사지
2. 일       자 : 2023년 12월 5일
3. 코       스 : 출발점~미탄사지삼층석탑~헌강왕릉~정강왕릉~천관사지~서천~북천자전거도로~원점
4. 거       리 : 약 22.36Km(실거리)
5. 시       간 : 2시간 21분(사진찰영포함)
6. 참       고 :  맑은 날씨
7. 동       행 :  나홀로
8. 교통참고 :  잔차와 두발로
9. 트      랙 :  ORUX,    2m 0초 20m S23울트라 기록입니다

2023-12-05 미탄사지,통일암,천관사지.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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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미탄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의 석탑이다.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복원된 현재 높이는 6.12m이다. 신라 왕경 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석탑으로, 그 형태가 정연하고 적절한 비례감을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이 변화되는 과도기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역사적 · 학술적 가치가 크다.

미탄사는 『삼국유사』와 『계원필경』 등의 문헌자료에 최치원의 옛집을 이야기할 때 언급된 유서 깊은 사찰이지만, 1980년 발굴조사 전까지 어디인지 불분명하였다. 그러나 1980년 삼층석탑 하부와 주변 발굴조사에서 '미탄(味呑)'이 새겨진 기와가 나와 이곳이 미탄사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탄사지 삼층석탑은 1980년 발굴조사 이전까지는 무너져 있어 기단부와 탑신부 일부 부재가 소실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1980년에 남은 부재들을 모아 복원하였고, 없어진 부재는 새로 만들어 조립하였다.

석탑은 낮은 하층기단과 높은 상층기단의 이중기단에 3층으로 이루어진 탑신부와 상륜부로 이루어진 신라의 일반적인 형태의 석탑 가운데 하나이다. 다만,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으며, 현재 높이는 6.12m이다.

이 석탑의 조성 시기는 옥개석 받침이 5단인 9세기 전반 이전 신라 석탑과 달리 3단인 점을 근거로 9세기 중엽 이후부터 10세기 초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기단의 탱주(撑柱) 수가 상 · 하층 각각 2개씩인 점, 기단을 구성하는 부재의 수와 기단과 탑신의 비례 등이 경주 천군동 동 · 서 삼층석탑,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 등 8세기 중엽 이전 석탑과 유사한 것으로 보아, 이 석탑은 아무리 늦어도 8세기 후반에는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미탄사지 발굴에서는 석탑의 기단부와 하부 구조가 밝혀졌다. 먼저 구덩이를 넓게 파고 이를 단단히 굳힌 다음, 큰 돌과 작은 돌로 채우고 점토를 다지고 불을 지펴 단단히 굳히는 것을 여러 차례 더하여 기초를 다졌다. 기단 내부에는 70㎝ 내외의 큰 돌을 쌓고 사이에 작은 돌과 흙을 섞어 다졌다.

하층기단 갑석 부분에서는 새 모양 석제품을 비롯하여 소형 금동불 입상, 수정제 장식, 금동 영락, 벼루 편 등 지진구(地震具) 6점이 수습되었다. 이 밖에도 넝쿨무늬 암막새, 도 · 토기, 당삼채 조각 등이 확인되었다.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왕경 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석탑으로, 비록 파손 및 결손된 부재를 신재로 보강 및 보충하여 신재와 구재 간 이질감이 있지만, 최초로 기초부 조사를 실시하여 조탑 방식 연구에 단초를 제공하였다. 또한, 그 형태가 정연하고 적절한 비례감을 지니고 있어 역사적 · 학술적 가치가 크다.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 변화되는 모습으로 과도기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석탑 양식 변화 연구의 실증적 자료로서 가치가 더욱 크다. 2017년 1월 1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개설
헌강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정(晸)이며, 경문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문의왕후(文懿王后),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이다. 875년에 즉위하여 886년에 승하할 때까지 12년간 재위하면서 문치와 내정에 힘썼다.

헌강왕릉은 1969년 8월 27일에 사적 제187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6만 9,626㎡이다. 왕릉의 배경인 남산은 주능선이 남북으로 길게 기복하고 그곳에서 달려나간 각 소릉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많은 골짜기와 봉우리에 형성되어 있다. 이 왕릉은 남산의 주능선에서 동쪽으로 뻗어내린 한 지릉의 말단에 위치한다.

내용
헌강왕릉에 대한 보수 수습 조사는 1993년 8월 초 우기 때의 자연붕괴로 인해 그 해 9월 16일부터 10월 30일까지 약 45일간 실시되었다. 이 기간에 봉토 단면과 유구 내부를 조사할 수 있었다. 무덤 크기는 지름 15.3m, 높이 4.2m이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원형봉토분으로서 밑둘레에는 길이 60∼120㎝, 너비 30㎝ 내외의 다듬은 돌을 이용하여 4단으로 쌓아올려 무덤의 보호석으로 삼아 튼튼히 하였다.

무덤 양식은 널길을 동벽에 편향해서 설치한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墓〕이다. 널방은 남북길이가 2.9m인데, 남북길이가 동서길이보다 약간 더 긴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널방의 벽석들은 최하단의 생토층을 약간 파내고 직경 40∼60㎝ 전후의 괴석으로 축조하였다. 하단부에는 비교적 큰 석재를, 상단부에는 작은 석재를 쌓았으며 사이사이 공간은 잡석으로 채운 후 틈사이를 강회로 막고 있다. 널방의 벽면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안으로 기울었으며 구석부분은 엇물려쌓기 방식으로 석재를 처리하고 있다.

널길은 널방 남쪽의 동쪽면에 치우쳐 부설되어 있으며 제반시설인 돌문〔石扉〕, 문지방, 폐쇄석, 무덤길〔墓道〕등을 갖추고 있다. 돌문은 장방형 괴석 한쌍을 동서에 수직으로 세워 활용했다. 문지방은 장방형 깬돌 3매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남북 장축의 평평한 면이 위로 오도록 가지런하게 놓고 빈 공간에는 잡석을 채워서 돌문을 세울 수 있도록 했다. 무덤길은 널길 뚜껑돌 아래의 첫 번째 남쪽 벽석부터 널길쪽으로 약간 튀어나오도록 하여 무덤길과 널길을 구분지었으며 이들 바닥층은 직경 15㎝ 내외의 납작한 자연석 1단을 전면에 깔았다.

의의와 평가
경주지역의 고분들은 대략 널무덤〔木棺墓〕·덧널무덤〔木槨墓〕시기,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시기, 굴식돌방무덤 시기의 3시기로 구분된다. 그런데 3시기의 묘제, 곧 굴식돌방무덤은 구조상 붕괴될 위험이 크고 도굴이 용이하다. 따라서 이 양식의 신라왕릉에 대한 연구경향은 봉분과 둘레돌 등의 외형적 모습을 서로 비교한 후 문헌과 접목시켜 왕릉 주인공의 진위여부나 위치와 선후관계를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헌강왕이 승하한 뒤 보리사(菩提寺)의 동남쪽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보리사를 기준으로 이에 해당하는 무덤을 헌강왕릉으로 비정하는 것이다. 보리사는 헌강왕릉 북서쪽에 위치한 작은 비구니 사찰로서 최근에 중건되었다. 그런데 이 사찰 뒤편에서 보물 제136호인 석불좌상이 발견된 바 있는데, 이 불상의 제작연대를 대략 8세기 중엽에서 후엽의 작품으로 판단하고 있어서 헌강왕이나 정강왕이 승하한 시기와 거의 비슷하다. 또한 이 석불좌상 외에도 주변에 산재하는 각종 석재, 탑재들과 지형은 과거 이곳에 존재하던 보리사와 관련되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한편 헌강왕릉은 무덤 보호석을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4단으로만 쌓아 올린 형식을 보이는데, 삼국통일 이후의 신라왕릉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써 중요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 개요[편집]
定康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위치한 신라 제50대 국왕 정강왕 김황의 능이다. 사적 제186호로 지정되었다.

 

2. 상세[편집]
경주 시내 동남쪽에 있으며, 삼국사기에서는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경주 남산동 산53에 있는 이 능을 정강왕릉으로 비정하고 있다. 경주시 시내버스가 많이 다니고 남산(경주) 등산할 때도 기점으로 많이 가는 통일전[1] 바로 옆 100m 거리에 있어서 찾아가려고 하면 가기는 쉬운데, 가는 길에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거쳐야 한다. 300m 거리에 형이자 선왕인 헌강왕릉도 있고 약 300m 거리로 가벼운 산책로 정도로 이어져있다. 양식이나 크기는 거의 똑같지만 정강왕릉이 비교적 초라한 편이다.

다만 이 무덤이 정강왕릉으로 비정된 건 체계적인 학문이 도입되지 않았던 조선시대의 비정으로, 현대 학자들의 연구 결과 이 고분이 실제 정강왕의 능이 아니라는 주장이 이근직 교수 등 학계에서 제기되고 있.. 이 무덤의 양식은 9세기 말엽에 재위한 정강왕 때보다 좀 더 이전 시기의 양식이기 때문이다. 이근직 교수는 이 무덤이 제47대 헌안왕의 무덤이 아닐까라고 주장했다. 현재 정강왕이 실제로 묻힌 무덤이 어디인지는 불명이다. 다만 진덕여왕릉(으로 알려진 고분) 뒤에 있는 대형 봉토분을 왕릉으로 본다면 헌강왕과 정강왕의 능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출처-나무위키-

 

 

천관사는 천관(天官)의 집터에 세운 절로, 김유신(金庾信)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김유신은 젊었을 때 우연히 천관이라는 기생을 알게 되었는데, 깊은 정에 빠져 매일 그녀의 집에 찾아가곤 하였다. 이 사실을 안 김유신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네가 장차 이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 공명을 세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랐는데, 천한 기생과 사귀어 스스로 귀함을 버리니 웬일이냐”고 물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김유신은 크게 뉘우친 뒤 “다시는 천관의 집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어느 날 김유신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를 태운 말이 어느새 천관의 집 앞에 이르러 멈추었다. 천관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김유신을 보자 기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감회를 억누르고 문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김유신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기고 대장부의 결심을 헛되이 한 죄가 모두 말 때문이라면서, 말의 목을 벤 뒤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인해 천관은 김유신을 사모하며 원망하는 노래인「원사(怨詞)」를 짓고서 죽고 말았다. 뒷날 김유신은 사랑하였던 옛 여인 천관을 위하여 그녀의 집터에 절을 세워 천관사라 불렀다고 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