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외사진/일상

진평왕릉,보문사지,효공왕릉,설총묘 ~ 2023년 12월 4일

龍宮 2023. 12. 4. 22:50

효공왕릉

1. 어       디 : 진평왕릉,보문사지,효공왕릉.설총묘
2. 일       자 : 2023년 12월 4일
3. 코       스 : 출발점~숲머리~진평왕릉~보문사지~효공왕릉~설총묘~원점
4. 거       리 : 약 14.6Km(실거리)
5. 시       간 : 2시간 21분(사진찰영포함)
6. 참       고 :  맑은 날씨
7. 동       행 :  나홀로
8. 교통참고 :  잔차와 두발로
9. 트      랙 : bluetooth gnss, ORUX, 
                   2m 0초 20m S23울트라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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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180호. 지정면적 4만 3,645㎡, 무덤의 지름은 36.4m, 높이는 7.9m이다. 진평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백정(白淨), 진흥왕의 장손자이다. 어머니는 만호부인(萬呼夫人)이고, 왕비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다. 579년에 왕이 되어 632년에 승하할 때까지 54년 동안 왕으로 있었다.

신라 초대 임금인 혁거세 다음으로 재위기간이 길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친 고구려의 침공에 대항하는 한편 수나라와 수교하였고, 수나라가 망하자 당나라와 수교하였다. 국내적으로는 원광(圓光)ㆍ담육(曇育) 등 승려를 중국에 보내 수도하게 하는 등 불교진흥에 힘썼다.

특히, 경주 남산성(南山城)을 쌓았고 명활산성(明活山城)을 개축하는 등 수도 방위대책에 힘썼다. 한지(漢只)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의해 장지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으로서 무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사용하여 무덤 보호석렬(石列)을 갖춘 것으로 여겨지나 지금은 몇 개만이 보인다. 이와같이 자연석을 사용하여 보호석렬을 마련한 예는 아달라왕릉 등 신라왕릉에서 자주 나타나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慶州 普門寺址 蓮華文 幢竿支柱)는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 보문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의 당간지주이다. 1987년 3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910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기도나 법회 등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기를 당(幢)이라 하며, 이를 달아매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이 장대를 양옆에서 지탱하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의 동남쪽에는 보문사의 옛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당간지주가 속한 절이 원래 보문사였는지, 아니면 별개의 사원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이 당간지주는 넓은 논 한가운데에 62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아래부분이 대부분 땅속에 파묻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밑의 구조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양쪽 지주의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부분이 두드러진 형태이며, 꼭대기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너비 13cm의 큼지막한 구멍을 두었다. 특히 지주의 윗쪽 바깥면에 네모난 틀을 두고, 그 안에 8장의 연꽃잎을 돌려 새겨 놓았는데, 이처럼 당간지주에 연꽃잎을 장식하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이 시기에 제작된 것 중에서도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위키백과-

보물 910호

 

 

보문사지석조(普文寺址石槽)는 대전광역시 중구 무수동, 보문사지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조이다. 1989년 3월 18일 대전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10호로 지정되었다.

개요
보문사터에 남아 있는 것으로, 사찰내에서 스님들이 사용하는 물을 담아두던 곳이다. 보문사는 확실한 창건시기를 알 수 없지만, 대전시 탄방동에 자리하고 있는 도산서원의『연혁지』에 이 절의 승려들을 동원하여 서원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어 조선시대 후기까지는 법맥을 잇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이 터에는 건물자리 5개와 석조·괘불지주·맷돌·세탁대 등이 남아 옛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조는 전체가 4각을 이루고 밑바닥과 각 면은 평평하게 다듬어졌다. 바닥아래와 윗부분에는 고인 물을 다른 곳으로 빼기 위한 구멍이 있는데, 특히 윗부분의 구멍이 주전자 꼭지모양으로 되어 있어 아름다운 곡선으로 흘러 내렸을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시대에 만든 작품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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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64호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시대 절터를 가리킨다.

이 유적은 보문부락의 앞들판에 있으며 멀리 서쪽에는 경주 낭산 일원(사적), 북쪽에는 명활성(사적)이 있다. 세워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신라 경문왕 11년(871)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절터의 대부분은 넓은 논으로 이용하고 있으나, 발견되는 석재들로 미루어 당시에는 많은 건물들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강점기에 ‘보문사(普門寺)’라 새긴 기와가 발견되어 절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서쪽에 있는 당간지주(보물)와 석조(보물)를 비롯해 당시 탑 따위의 석물들이 남아 있다.

※(경주보문리사지 → 경주 보문동 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8m. 이 당간지주가 있는 장소는 통일신라시대에 보문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에도 금당지·쌍탑지·건물의 초석 등 많은 유적과 유물을 조사할 수 있다.

특히, 절터에서 ‘普門(보문)’이라고 쓰인 기와조각이 발견되고 있어 이곳이 보문사의 옛터임을 증명하고 있다. 당간지주는 절터 서남쪽에 있으며 64㎝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상대하여 서 있다.

서로 상대하여 면하고 있는 내측면과 외면, 전후측면에는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는데, 외측면만은 양변의 모[角]를 죽여 다소의 장식의장을 보이고 있다.

북쪽의 지주는 상부가 절단되었으나 남쪽의 것은 완전한데, 그 정상부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반원형의 선을 그리며, 외부로 깎여지되 정상부 이하는 사선(斜線)을 그어 2㎝쯤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그 이하 하단부까지는 내측면을 제외한 3면의 넓이나 두께가 2, 3㎝쯤 굵어졌다. 그러므로 이 지주를 외면에서 보면 상하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을 주면서 가늘고 긴 모습으로 보인다. 가운데의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상중하 세 군데에 구멍을 마련하여 장치하였던 것인데, 그 간공은 남북 양 지주의 것이 같지 않다.

즉, 남쪽 지주에는 정상부에서 28㎝ 밑에 길이 17㎝, 너비 15㎝의 네모난 관통공(貫通孔)이 있으며, 다시 그 밑으로 각각 129.5㎝의 사이를 두고 같은 크기의 네모나게 뚫은 관통공이 두 곳에 있는데, 북쪽 지주는 남쪽 지주의 관통공과 상대되는 위치마다 내측면에 길이 13㎝, 너비 15㎝, 깊이 17㎝의 장방형의 구멍이 있으나 관통되어 있지는 않다.

본래는 양쪽 지주를 받고 있던 기단이 있었을 것인데, 현재는 양 지주 사이 기저부에 길이 127㎝, 너비 67㎝, 높이 36㎝의 장방형 간대(竿臺)가 있을 뿐이다. 이 대석은 측면에 아무런 조각장식이 없이 4면의 모를 죽여서 돌을 다듬었다.

전체의 형태가 장대하고 소박하며 한 쪽의 지주석에만 관통공이 있는 것은 당대의 지주로서 매우 희귀한 예라 하겠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보물 123호

 

사적 제183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제52대 국왕 효공왕의 능.
2. 상세[편집]
912년경 조성되었다.
조선 영조때 경주 황오동 삼층석탑을 근거로 효공왕의 능으로 비정되었다.
원형 토분으로 봉토 밑에 드문드문 자연석이 보이며지그재그,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렸다. 그 외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단순한 형태이다. 낭산 근처에 있다.

-나무위키-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로 지정면적 1,168㎡이며, 원형봉 토분이다. 설총의 아버지는 원효(元曉)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신분은 육두품 출신으로 추측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설총은 경사(經史)에 박학하였고, 이두(吏讀)의 정리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화왕계(花王戒)」를 지었다.

뒷날 그의 학문적 업적이 인정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줌)받았고 문묘(文廟)에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또 조선 중기인 1623년(광해군 원년)에 경주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한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설총을 경주 설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설총의 무덤에 대해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신라 당시의 형편을 고려해보면 경주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명활산 동쪽 아래에 있는 이 분묘는 족보에는 “묘월토산자좌(墓月土山子坐)”라는 기록에 비추어 산의 명칭에서 차이가 있지만 경주 단석산을 월생산(月生山)으로 부른 예가 있음으로 보아 명활산을 월토산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명활산 동쪽 능선 아래에는 마을이 있고 인근에 10여 호의 가옥이 있다. 원래는 산록이었으나 개간이 이루어진 현재는 주위가 전답이다.

분묘의 둘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경주 및 순창(淳昌) 설씨 후손들에 의해 상석과 묘비가 만들어졌으며 외곽에 철책이 둘러 있다. 호석(능원에 세우는 범모양의 돌)은 흙 속에 묻혀져 있으나 일부의 흔적은 보이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