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외사진/일상

낭산,천년숲,옥룡암~2023년 11월 9일

龍宮 2023. 11. 9. 21:29

1. 산 행 지 : 경주 낭산 천년숲일대
2. 산행일자 : 2023년 11월 9일
3. 산행코스 : 출발점~독서당~능지탑지~선덕여왕릉~사천왕사지~망덕사지~천년의숲~옥룡암~황룔사지~분황사~원점
4. 산행거리 : 약 13.8Km
5. 산행시간 : 3시간 59분(휴식포함)
6. 산행참고 : 
7. 동      행 : 나홀로
8. 교통참고 :  두발로
9. 트      랙 : bluetooth gnss, orux m10s
                 2m 0초 20m S23울트라 기록입니다.

2023-11-09 낭산,천년숲일대 m10s orux s23u.g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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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탄사지삼층석탑

경주 미탄사지 삼층석탑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미탄사지에 있는 통일신라의 석탑이다. 8세기 후반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복원된 현재 높이는 6.12m이다. 신라 왕경 내에 현존하는 유일한 석탑으로, 그 형태가 정연하고 적절한 비례감을 지니고 있다. 통일신라의 석탑 양식이 변화되는 과도기적 요소를 지니고 있어 역사적 · 학술적 가치가 크다.

이하 ~한민족대백과사전~

미탄사지 삼층석탑

 

독서당

낭산의 서북쪽에는 국립경주박물관을 바라보는 곳에 신라 말 유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책을 읽었다는 독서당이 남아 있으며, 그 아래에는 신라시대의 목탑터 또는 건물터가 있어 옛 자취를 살필 수 있다.

독서
낭산
삼존불상이 있는 중생사는 공사중이라 패스

 

능지탑지

1982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능지탑의 외관은 1979년에 보수할 때 임시로 정사각형 평면의 2층 석조 축단(築壇)으로 복원되었다.

기단부는 한 변의 길이가 12m, 높이가 1m인 석단으로, 상부의 낙수면은 토층으로 덮고 잔디를 심는 방식으로 마감되었으며, 둘레의 중대석에는 12지상 9구를 방위에 맞추어 같은 간격으로 기둥처럼 배치하였다.

12지상 가운데 뱀(남면)·범(동면)·용(동면) 등 3구는 없어졌다. 현존 12지상 중 일부는 낭산 동쪽 황복사(皇福寺) 앞에 있던 유구로서, 목탑터로 알려져 오다가 최근에 왕릉터로 수정된 유적지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갑석은 연꽃을 새긴 장대석과 정사각형 대석 두 가지인데 후자는 귓돌로 사용되었다. 1층탑신부는 옥신의 한 변이 6m이고 기단부처럼 연화석을 얹었는데, 다만 상부에 굄돌 1단을 더 쌓고 토단을 경사지게 쌓아올려 사모지붕처럼 마감하고 중심부에 자연석을 마치 보주(寶珠)처럼 사용하였다. 한편 연화석은 양식적으로 8∼9세기에나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여, 석단형 유구가 후대에 조성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낳고 있다.

능지탑은 예로부터 능시탑(陵屍塔) 또는 연화탑으로 불려왔는데, 무너진 채 1층탑신 일부와 기단 약간만이 돌무더기처럼 버려져 있던 것을 신라삼산조사단(新羅三山調査團)이 1969년 이래 1971년까지 4차에 걸쳐 조사한 끝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무왕의 화장터 유적으로 비정하였다.

이후 1975년의 해체·발굴조사로 정사각형 석단 중앙부에 찰주석이 지층 아래까지 세워져 있고, 찰주석(擦柱石) 하부에는 공간을 포함한 토석 유구가 있으며, 토석 유구와 주변 지층이 까맣게 그슬려 있는 것이 확인되어 화장묘(火葬墓)로 추정되었다.

그러니까 원래 창건 당시에는 목조건물로 된 묘가 있었으나 이것이 언제인가 소실되자 이 화장묘를 보존하고 예배하기 위하여 외부에 정사각형 석단을 축조한 것으로 추정하고 이를 문무대왕의 화장 장소로 비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탑 기단 내부에서 소조(塑造) 불상의 파편 여러 개와 수많은 와전이 출토되었는데, 이것들은 통일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여겨지고 있어서, 현존 석단 이전에 창건된 건물, 즉 문무왕의 탑묘(塔廟)에 쓰였던 유물로 추정되고 있다.

학술적으로는 이른바 방단형석탑(方壇形石塔)으로 분류되고 있는 이 탑은 원래의 모습을 정확히 알기는 어려우나 지금과 같은 규모의 평면에 5층으로 쌓아올린 석조 축단형 구조물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현재 터의 향좌측에는 보수할 때 사용하고 남은 연화석 36개가 쌓여 있고, 그 옆에 성격이 구명되지 않은 토단 유구가 남아 있다.

 

선덕여왕릉

사적 제182호. 지정면적은 사적 제163호로 지정된 경주 낭산(狼山)의 전체 면적 82만 7,848㎡에 포함되어 있다. 무덤의 지름은 23.6m, 높이는 6.8m이다.

선덕여왕의 성은 김씨,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제26대 진평왕의 맏딸로 어머니는 마야부인(摩耶夫人)이며, 진평왕이 아들없이 승하하자 추대로 왕이 되었다.

632년 왕이 되어 647년에 승하할 때까지 15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연호를 인평(仁平)으로 고치고, 분황사(芬皇寺)를 창건하고, 특히 첨성대(瞻星臺)ㆍ황룡사9층탑을 건립하는 등 문화발전에 힘썼으며, 김유신ㆍ김춘추 등의 보필로 선정을 베풀었다. 죽은 뒤 낭산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에 의해 지금의 위치에 비정하고 있다.

선덕여왕은 죽거든 도리천(忉利天)에 묻어 달라고 했는데 신하들은 도리천이 하늘 위에 있는 산이기 때문에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왕은 도리천은 낭산의 산정이라고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곳 낭산의 신유림(神遊林) 정상에 장사지냈다고 한다.

문무왕 때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한 후 신유림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하고 호국신(護國神)인 사천왕을 모셨다. 이후 비로소 선덕여왕의 유언을 이해하게 되었다. 사천왕이 있는 곳을 사왕천(四王天)이라 하고 그 위에 있는 부처님 나라를 도리천이라 한다. 이로써 낭산 정상이 도리천이라는 뜻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무덤의 외부모습은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길이 30∼60㎝ 크기의 자연석을 사용해 2, 3단 쌓아올려 무덤의 보호석렬(石列)을 마련하였다.

 

사천왕사지

사적 제8호. 679년(문무왕 19)에 창건된 사천왕사는 쌍탑식(雙塔式) 가람이며, 창건과 관련된 많은 설화를 통해 당시 신라인들의 우주관과 호국사찰이었던 사천왕사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이 사지(寺址)는 원래 신유림(神遊林)이라고 하는 칠처가람지허(七處伽藍之墟)의 하나로 신성시되었던 곳이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으라는 유언을 남기면서 이곳을 지목했는데, 여왕이 죽은 지 30년 뒤에 왕릉 아래에 사천왕사를 짓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다시 여왕의 예지력을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이 설화는 낭산을 수미산처럼 여긴 신라인의 불국토사상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수미산 꼭대기에 도리천이 있고, 그 아래에 사방을 관장하는 천왕의 주처인 사천왕천(四天王天)이 있다는 불교적 우주관과 일치하는 것이다. 또다른 설화에 의하면 674년 당이 신라를 침공하려 하자 문무왕이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당군을 막을 계책을 구했다. 이에 명랑법사는 낭산 남쪽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을 쓰라고 일러주었다. 그러나 침략이 임박하여 절을 완성시킬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자 우선 채백(彩帛)으로 절을 짓고 풀을 묶어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든 후 유가명승(瑜伽明僧) 12명으로 하여금 비법을 쓰게 했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일어 당군의 배는 모두 침몰되었다고 한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하여 사천왕사라고 이름하고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을 두어 관리하게 했다고 한다. 가람배치는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에 탑을 세운 쌍탑식가람이며, 금당 북쪽으로는 좌우에 경루를 두었다. 두 탑지(塔址)에는 사방 3칸의 초석이 남아 있고, 그 남쪽에는 중문지(中門址), 경루 북쪽으로는 강당지가 있으며 둘레를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고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초무늬 와당(瓦當)과 사천왕이 새겨진 전(塼)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유물은 사지 동편에 있는 머리가 없어진 귀부 2기, 비신, 당간지주뿐이다.

 

 

망덕사지

망덕사는 문무왕 19년(679)에 당나라가 사천왕사(四天王寺) 창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사신을 파견하자, 신라 왕실이 이를 속이려고 임시로 지은 절이다. 그 뒤 효소왕 1년(692)에 다시 지어 완공하였다.

절터는 낭산(狼山) 남쪽의 사천왕사에서 남쪽으로 좀더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남쪽 끝부분은 경사가 급한 편이고, 그 남쪽에는 남천(南川)이 흐른다. 현재 동서 목탑터와 금당(金堂)터, 강당(講堂)터, 중문(中門)터, 회랑(廻廊)터 등이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 또한 남쪽에는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서쪽에는 망덕사지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자리하고 있는데 원래의 위치는 아닌 듯하다.

1969년∼1971년 3차례에 걸쳐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금당터는 축소된 것으로, 원래의 받침 부분 너비가 동서(東西) 방향으로 좀더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탑이 있던 자리에는 받침돌 아래의 바닥돌과 계단의 바닥돌이 남아 있으며, 동탑에도 대부분의 주춧돌이 원래의 위치에 남아 있다. 중문터와 동서 회랑은 받침 부분의 범위가 확인된 정도지만, 회랑은 일부 자연석 또는 벽돌로 된 받침돌만 확인되었다. 특히 금당과 회랑 사이에는 익랑(翼廊)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신라의 쌍탑 가람에서 익랑이 필수적이었음이 알려지게 되었다. 강당터는 훼손이 심하여 받침 부분의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으나, 주변에서 발견된 유구(遺構)로 보아 조선시대까지 작은 암자 등이 자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중문 앞 경사진 곳에는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거대한 돌계단이 있는데, 이것은 불국사의 경우와 같이 중문 앞에 규모가 큰 계단을 설치하는 방식이 당시 사찰 조영의 일반적인 사례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천년의 숲

 

 

옥룡암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은 경주시 남산 탑곡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마애불 여럿이다. 9미터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상군의 만다라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1] 바위의 네 면에 거의 빈틈없이 여러 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보살상·스님의 조각상·비천상 등 23구의 조상이 있을 뿐 아니라 9층탑·7층탑과 사자상, 보리수로 보이는 나무 등을 조각하여, 천상과 지상의 정토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두 암벽을 갈아 부조로 새긴 것이며, 남면에 입체 여래상 1구가 있다.[2]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201호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慶州南山塔谷磨崖彫像群)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